고미술 /한국도자기

조선시대 분청사기인화국화문옥호춘병

갠하늘 2017. 7. 1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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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분청사기인화국화문옥호춘병

粉青沙器印花菊花纹玉壶春瓶

 

 

 

높이 28.4cm          조선시대  15세기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의 준말로 고유섭()이 명명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릇 표면을 백토()로 분장[화장]하여 전체적으로 백색을 띠며 유약을 바른 후의 색조는 회청색을 띠는 도자이다. 분청사기는 한국도자사의 큰 흐름에서 볼 때 청자의 맥락 위에 있으나 청자보다는 태토 내 철분의 함량이 적어 청자에 비해 색이 밝아지고 유약도 희어져 전체적인 색감은 밝은 회청색을 띤다.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에 생산되었고 15세기 전반 세종의 재위시기에 가장 다양하게 발전하여 전국에서 생산되었다. (분청사기인화문병: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의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분청사기 그릇의 형태는 고려시대의 것이 대부분 계승되면서 조금씩 변화되었으며, 대접의 경우 기벽이 비교적 얇고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 형태가 많다. 매병은 고려매병의 당당한 형태와 뚜렷한 차이를 보여 전체적으로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S자형의 굴곡이 심해지며 구연부가 넓은 큰 항아리가 늘어난다. 특히 제기()의 경우 고려시대에서는 볼 수 없던 기형으로 조선사회의 유교적인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그릇 표면을 백토로 씌우는 백토분장기법과 그 무늬에 있다. 백토분장의 동기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 말에 철분이나 잡물이 많이 섞인 조잡한 청자가 제작되자 이러한 잡물을 감추기 위하여 백토로 분장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14세기 당시 중국도자가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백자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표면을 백색화하려 했다고 보기도 한다. 분청인화()는 점열() 또는 국화문, 육가변문() 등의 도장으로 표면을 찍은 후 백토를 넣는 방법이므로 노동절감과 동시에 대량생산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인화기법도 넓은 의미로는 상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 분청사기병은 전형적인 옥호춘병의 기형으로 크게 네 등분이 되어 있으며 각각의 구분은 음각으로 굵은 선을 만들어 구분하였으며 모두 국화문을 인화기법으로 장식하였다.   굽은 다리굽에 작은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아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인화문분청사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