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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청자와 모란꽃

갠하늘 2017. 6. 1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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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청자와 모란꽃

 

 

고려시대 청자 음각 모란절지문완 青瓷阴刻牡丹纹碗

높이 4cm     입구지름  11.7cm  

 

 

여기에 음각으로 표현된 문양은 모란꽃과 가지인데  고려시대 청자의 문양 중 가장 빈번한

 

문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려시대 도공들과 청자의 주요 수요층이었던 지배층에게

 

모란은 어떤 의미 였을까?

 

 

 

모란은 꽃이 화려하고 풍염()하여 위엄과 품위를 갖추고 있는 꽃이다. 그래서 부귀화()라고 하기도 하고, 또 화중왕()이라고 하기도 한다.꽃중의 왕.

 

모란의 다른표현인 천향국색()은 문헌에 따라서는 국색천향이라고 하고 있는 곳도 있다. 국색은 나라 가운데서 가장 미인이란 뜻이고 천향은 하늘에서 내려진 향기라는 것인데 대단히 좋은 향기라는 뜻이다. 즉 하늘에서 내려진 것과 같은 향기로움을 지니고 나라 안에서 제일 가는 미인과 같이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라는 뜻이다.

 

모란은 가장 중국적인 꽃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란 문화는 그대로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우리의 꽃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모란은 중국이 원산지이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많이 개량되었으며 중국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아온 꽃이다. 그래서 가장 중국적인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란은 수나라 때(6세기)에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서 재배식물로 재배하게 되었는데 그후 당대(7~8세기)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다. 《오잡조()》에는 당나라 고종과 무후()시대에 모란이 처음으로 후원에 심어져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현종의 개원() 연간에는 궁중을 비롯해서 민간에서도 다투어 배양하여 진중()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안에서는 5월이 되면 온 도시가 모란꽃으로 가득차고 곳곳에서 품평회나 원유회가 열리고 꽃구경하는 사람이 넘쳤다고 한다. 그 모습을 "장안 사람들은 성을 비우고 나와서 취한 듯 미친 듯 하였다()"고 표현하였다.

 

모란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북송(宋: 우리의 고려시대)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이름 높은 구양수()가 쓴 〈낙양모란기(洛)〉이다. 그는 이 글 가운데서 "모란에 이르러서는 굳이 꽃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고 바로 꽃이라고 한다. 그 뜻은 천하의 진정한 꽃은 오로지 모란 뿐이라는 것이다(  )"라는 최상의 예찬을 헌사하였다.

 

 

모란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진평왕 때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 때 "당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빛깔의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라 말엽의 최치원()이 각 사찰과 석대()를 돌아다니면서 모란을 심었다는 고사도 있다.

고려시대에 내려와서도 모란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현종 때에는 대궐 안 사루() 앞에 손수 모란을 심었으며 예종은 이 사루에서 모란 시를 짓고 유신들에게 명령하여 화답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 이전 덕종으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모란꽃을 읊고 신하들은 이에 화답하는 행사가 되풀이되었다고 한다. 의종 때 임춘()의 《서하집(西)》에 실린 〈양국준가정홍모란()〉이란 시에서는 "벼슬하는 집들은 다투어 모란을 심는다"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후 충숙왕 때에는 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본국으로 돌아올 때 원나라 천자가 진귀한 화초를 많이 주었는데 그 중에 황·백·적·홍색의 모란이 들어 있었다고 하므로 모란은 그때 이미 여러 가지 색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 중기 이후에는 궁중은 물론 권문세가들이 서로 다투어 진귀한 품종을 집안의 정원에 심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는데 그것이 너무 호화롭고 사치스럽다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고려사》 〈열전〉에는 기홍수()와 차약송()이 어느날 관청에 앉아 모란 기르는 법을 논했는데 사람들이 호화사치를 숭상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고분에서 발굴된 부장품인 화운개() 등에서는 모란꽃 문양이 발견되고 있다. 이로 보면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사후에도 모란꽃을 좋아하고 부귀를 누리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고려 고분에서 발굴된 부장품의 하나인 화운개(花雲蓋)

                             고려 최사위(崔士威, 960~1041)의 묘에서 발굴됨. 장서각 소장고려시대에 그렇게도 대단했던 모란에 대한 애상 열기는 조선시대에 접어 들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유교사회에서 아취와 고절을 숭상하는 선비들의 꽃에 대한 애상의 열의가 모란에서 매화나 국화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바로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문양에 영향을 주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