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 /柴窯(시요)연구

중국 오 대 세종 柴 世宗(柴荣)

갠하늘 2020. 10. 27.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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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역사에서 오대라고 하면 907년에 당나라라고 멸망하고 생긴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后梁、后唐、后晋、后汉和后周) 다섯 왕조(907~960)를 말하며, 그 왕조에는 10개의 나라(정권)가 (902-979) 군웅할거를 하고 있었는데, 이 시대를 오대 10국 시대라고 부르며 간략히 오대라고 부른다. 이후960년에 송의 태조가 되는 조광윤에 의해 이 오대10국이 멸망하고 새로 통일하여 단일한 국가가 성립되었는데, 그게 宋이다. 후에 이 송도 멸망하여 남송이 되는데, 남송이 되기까지의 기간을 후대에는 북송이라고 부른다. 

 차이요와 관련하여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시기는 이 오 대 왕조 중에서 마지막 황제였던 후주의 두 번째 황제인데, 그 가 바로 오 대 시기 후주의 두 번째 황제인 후주 세종 柴荣(차이롱/시영)이다. 

 주 세종(921-959)은 후주의 첫번째 황제였던郭威(곽위)의 양자가 되어 원래 性이었던 柴를 버리고 황제이자 양아버지의 성 곽 을 써서 곽 영 이라고 불리었는데, 곽위가 죽고 본인이 황제가 되자 세상은 다시 그를 차이 영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 세종 차이영은 원래 곽위의 양자가 되기 전에는 도자기를 판매하는 도자기 장사꾼이었다고 한다. 차이롱의 누나가 곽위의 처가 되면서 곽위에게 후사가 없어 곽위의 양자가 되기 전까지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도자기 판매를 위해  전국을 유랑하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도자기와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현상을 통찰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도 갖게 되어 후에 황제가 되어 큰 꿈을 실현하기를 기대하였다고 한다. 

 954년(현덕원년) 황제가 되고 당시의 혼란한 사회에 종지부를 찍고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큰 꿈을 발표하는데,

“以十年开拓天下,十年养百姓,十年致太平”"앞으로 10년 동안에 세상을 평정하여 흩어진 각 나라를 통일하여 전쟁을 없애고, 그다음 10년 동안에는 백성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자기의 마지막 10년은 태평성대를 이루리라."이런 다짐을 하고 이를 공표하는데, 이 무렵에  御批云:‘雨云破,者般色做将来’。 이런 말이 있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비온뒤의 하늘

어떤 도자기를 만들어 올릴까요?라는 물음에 "비 온뒤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뚫고 나온 그 모습을 만들어 보아라"라고 하였다는 말,  황제로서 위와 같은 30년 통치 계획과 함께 전하여 내려온 말이다. 즉, 어려움을 이겨내고 태평성대를 만들어 가는 그런 모습을 실제 보고 싶었다는 해석이 있다. 이런 문헌들이 있어 송대 초기에도 차이요와 관련해서 구양수는 "柴氏窑色如天""차이 씨 요의 모양은 하늘의 그것과 같고,명대의 문인 사조석은 陶器柴最古,今人得其碎片,亦金翠同价矣。盖色既鲜碧,而质复莹薄,可以装玩具;而成器者,杳不可复见矣。柴世宗时烧,"도자기중 최고 오래된 것은 차이 요 이고 차이요는 차이 세종 시절 만들어 졌다고 전해져 내려온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6년의 아주 짧은 기간 재임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업적을 이루고 많은 개혁적 성과도 내었다고 한다. 이런 업적과 성과는 우리 고려와도 많은 연관이 있었다. 당시 고려의 왕은 광종 시기였는데,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중요한 인사 등용 방식인 과거 제등 고려의 대표적인 개혁 성과물들이 광종 시기에 있었는데, 이 과거제는 후주 세종이 만들었다고 한다. 후주와의 교류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추측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에서 많은 미스테리한 황제의 죽음을 볼 수 있는데, 이 후주의 세종 또한 그러하다. 역사 기록으로는 전쟁 참관을 위해 외지 출장 중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외지에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당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 의해 그의 죽음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한다.  송의 건국자인 조광윤은 원래 차이 세종의 군사 장군이었는데  차이 세종이 많이 신뢰하여 개인적으로도 아주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차이 세종이 죽을 때도 함께 있었고 차이 세종이 죽자 그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채 몇 개월이 되지 않아 국호를 새로 정하고 자기가 황제로 등극하였다. 

 

朱熹:周世宗亦可有天下之量,纔元稹均田,便慨然有意。周世宗大,然性迫,无甚象。做好事亦做教显显地,都无些含洪之意,亦是短而然

우리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사상적 지주였다고 할 수 있는 주희의 차이 세종에 대한 평,

아래는 명나라를 건국한 명 태조 주원장의 차이 세종에 대한 평

朱元璋:三代之王有其时而能为之,汉文有其时而不为,周世宗则无其时而为之者也。

중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황제이지만 중국 역사에서 많은 유명한 위인들이 차이 세종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는데, 모두 위의 내용들과 대동소이하다.

 

모두 차이 세종에 대해 위대하며 삶이 안타깝다고 하고 그의 기상을 흠모한다는 내용들이다. 

 

여기서는 차이 세종에 대한 역사적인 과업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서 차이요와 관련된 대략적인 최소한의 사실만 점검하고 넘어 가기로 한다. 여기서 추가할 사항은 차이 세종의 년 호는 현덕德인데, 이 현의 원래 글자는 옛날에는 이라고 쓰였다. 

 

 이런 황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바로 도자기 '차이요'이다. 즉 후주 시대 차이롱 주 세종의 명으로 만든 그 전설 속의 도자기는 어떠한 도자기 인가? 있기는 있는가? 어디에서 만들어졌는가?  그 모양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