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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기 40

明代 洪武 釉里红 缠枝牡丹菊纹碗명대자기 홍무시기 유리홍완

明代 洪武 釉里红 缠枝牡丹菊纹碗명대자기 홍무시기 유리홍완 입구 지름 21.6cm 홍무洪武(1368~1398) 시기 유리홍 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홍무)은 원래 젊은 시절 밥을 제때 제대로 먹기위해 스님이 되기도 했지만 한때의 직업으로 도자기를 파는 장삿꾼이기도 했답니다. 홍무시기의 관요 도자기 중 아직 공식적으로는 "대명홍무년제"같은 관지는 없다. 관요와 민요의 구별이 없는 셈이다. 원 나라를 멸망 시키고 새로 건국을 하는 과정이라 당연히 혼란 스런 상황이며 , 건국시기의 수도는 지금의 남경으로 홍무 다음의 황제인 영락시기 지금의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명대 정식 관요의 구별은 이 두번째 황제인 영락 시기 후반기 부터 가능한데 바로 사회의 안정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어쨌든 본 작품은 당연히..

清代乾隆 斗彩 三多纹 水盂 청대 건륭 두채 수우 자기

清代乾隆 斗彩 三多纹 水盂 청대 건륭두채 수우 자기 높이 3.8cm 청대자기 건륭시기 두채 삼다문 수우(연적) 口沿向内敛起,直腹,底内凹。口沿饰如意云头纹一周,壁上斗彩绘折枝寿桃、佛手、石榴三多果纹。近足外饰以海水纹。器形规整釉面匀净。青花发色清丽,釉上彩色泽清雅,呈现和谐之美。水盂为文房用具,乾隆以後除实用价值外,更多把玩之用。 아주 작은 크기의 문방 용품인데 , 우리의 연적 용도로 수우라고 하는데 두채의 제박방식으로 삼다문三多紋을 그려 넣었다. 그래서 크기는 작지만 의미는 아주 큰 그런 작품이다. 기물 입구에 구름문을 그리고 기물 밑 쪽에 바닷물 문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중간 전체에 삼다문을 장식하였다. 중국 청대 특히 건륭시기 도자기중 두채와 분채에 삼다문 문양을 많이 넣었는데 삼다문이란 장수(壽)와 복(福)을 기원하..

南宋 湖田窑 青白釉 花纹小水注 송대자기 호전요 청백유 수주

南宋 湖田窑 青白釉 花纹小水注 송대자기 호전요 청백유 수주 높이 7.6cm 남송시기 호전요 湖田窑 青白釉 작은 주자 문방용구로 우리의 연적에 해당하는데 은은한 청백유로 꽃과 줄기 잎을 표현하여 당시 사대부의 운치와 기품을 잘 느낄 수 있게 표현해 준다. 중국 도자기에서 호전요는 북송때 부터 제작이 되어 왔는데 북송시기 5대 명요등 많은 명품들이 있어 황실에서 그리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송이 멸망하고 남송에 이르러 호전요의 제작 수준이 월등히 진보하고 당시 사회 상황을 반영한 작품들의 출현으로 황실은 물론 일반 지배 계층에서도 많은 수요가 있었다. 그러나 본래 기물이 얇아 보관에 어려움이 있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어 지금 각 박물관에 남아 있거나 민간에 유통되는 진품은 아주 드문데 시장..

乾隆 德化窑兽面纹觚

乾隆 德化窑兽面纹觚(건륭 덕화요 수면문 고) 높이 20.6cm 건륭시기(1711~1799) 덕화요(德化窯) 고觚 덕화요는 명대부터 민간에서 많이 좋아했던 요지로 주로 종교용품들을 제작했는데 특히 명대 청대의 불상 관음상으로는 최고로 여긴다. 각 시기마다 지배층에서 많이 좋아했지만 특히 건륭시기에는 황실에서도 주문 제작식으로 많은 기물들을 들였다. 본 기물과 같은 형태를 고(술잔)라고 부르는데 이의 기형은 중국 최고 고대 商代의 청동기 기형으로 이를 도자기로 모방해서 제현해 내어 술잔의 용도가 아니라 진열 및 제례의식용으로 사용하였다. 아래는 같은 건륭시기의 두청유 고 아래는 닫 박물관의 商代 청동기 觚 아래는 청대의 방품으로 경매 출품작

초기 청자 : 东晋时期 越窑 동진시기(317년~420년)월요

초기 청자 : 东晋时期 越窑 동진시기(317년~420년)월요 동진시기의 월요 청자는 우리 고려청자는 물론 중국 청자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이것보다 더 이른시기의 청자가 있긴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청자의 모든 특성을 담은 청자는 이때의 동진 시기 청자가 시조라 할 수 있다. 아래는 같은시기 당시의 상형청자로 용도라기보다는 장식용 혹은 어린이들을 위한 지금의 완구의 기능을 갖는 청자이다. 이런류는 후에 당대 송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요지에서 다양하게 제작이 되는데 부장품의 주요 품목이 된다.

중국도자기-송대자기

송대자기 우리의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중국의 북송시기 월주요 주전자 우리의 고려청자 발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월주요 청자인데 청자 유면, 음각 기법, 굽의 제작방식(규석받침처럼 받침을 사용하여 구움), 기형등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 우리의 청자는 중국의 송대 자기중 위의 월주요와 요주요 정요 자주요등의 제작기술을 전수 받아 독특한 우리만의 멋을 내어 완성한것으로 전해진다. 아래의 기물들은 송대자기의 다양한 작품들로 중국 도자기 중 송대자기 전체의 느낌을 얻는데 도움이 될걸로 본다.

大明宣德龙凤纹高足杯

大明宣德龙凤纹高足杯 대명선덕 용봉문 고족배 선덕년제(1425~1435) , 높이 8.4cm, 입구지름 8.9cm 관지와 약간의 무늬에 청화를 넣었으며 외부 전면에 용 과 봉황을 선명하게 양각으로 입혔다. 전체적인 기형은 엄정하며 관지는 관요로서의 기품이 있으며 용과 봉황의 문양은 이주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색은 순백을 띄며 입구의 변은 날카로울 정도로 얇아 제작의 높은 기술을 실감할 수 있다. 그외 유면은 투명한 유리질감을 준다. 명대 초기의 선덕황제는 10년의 짧은 재임 기간이지만 도자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그 중 고족배는 선덕시기의 대표적인 기형이라 할 수 있으며 후대의 황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이를 수집하기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으며, 그래서 지금의 고궁은 물론 많은 박물관에서..

北宋耀州窑刻花梅瓶

北宋耀州窑刻花梅瓶 송대 요주요 매병 높이 24.5cm 북송 시기 초기의 요주요 작품으로 최상급의 품질을 갖는 매병이라고 할 수 있다. 요주요의 최고 전성기는 오대시기(906~960)라고 할 수 있는데 오대가 무너지고 송나라(북송)가 들어서면서 여기 요지들의 도공들이 중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는데 그 일부의 도공들은 당시 월주요의 도공들과 더불어 우리의 고려로 들어가서 고려청자의 기반 을을 잡는데 일정정도 역할을 했을걸로 추정한다. 본 기물과 함께 아래의 사진자료들은 우리의 고려청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우선 아래는 오대시기의 요주요 작품들(요주요 박물관 소장) 아래는 오대이후 이어진 북송시기 박품들(각 박물관 소장품)

清代早期 青花 청대초기 청화 두점

清代早期 青花 청대 초기 청화 두점 清 顺治 人物故事图盖罐 청대 순치시기(1643~1661) 인물고사도 개관 청대의 첫번째 황제로 아직 체제 정비가 되지않고 통치기반이 공고하지 않은 상황으로 특별히 관지는 없지만 본 기물과 같은 류의 것을 보통 관요로 여긴다 . 청대의 경우 년호를 넣어 관요를 구별하는것은 두번째 황제인 강희 초기가 지나서야 "대청강희년제"와 같은 관지를 써서 관요를 구별하였다. 혼란했던 수십년간의 명대말기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수준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역시 청대 초기의 청화 세( 洗 ), ”康熙辛亥中和堂制”款人物故事图洗 강희 재임 10년(1671년)시기의 관요. 여기서 말하는 중화당은 원명원의 황제거주 궁을 말한다. 강희 재임 61년 중 10년차 까지도 아직 강희년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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